종두와 공주는 상당히 닮은점이 많다. 이들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존재들로서 사회적으로 무능력하고, 삶의 희망이 없는 주인공이다. 1급 지체장애자인 공주의 활동영역은 자신의 주거공간이상으로 뻗어나갈 수 없다. 공주가 거울로 벽면을 비추며 장난을 치자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장면은 공간 안에 갇혀져 더이상 뻗어나가지 못하는 공주 자신의 안타까움을 은유한다. 공주의 지체장애는 매우 심하여 관객의 눈을 매우 긴장시키고 불안을 유발하며,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감독은 관객의 그러한 시선이 단순한 동정에 의한 것임을 이미 간파하고 있다. 공주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녀의 친오빠가 그러하듯이-최소한의 의식주를 해결시켜 준다거나 하는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것, 그리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정과 사랑을 베푸는 것임을 감독은 영상을 통해 끊임없이 관객의 마음을 채찍질하고 있다.
공주가 거주하는, 낙후되어 곧 무너질듯한 허름한 아파트의 모습은 3류의 생활 그 자체를 말하고 있다. 전과 3범출신에 약간의 정신장애까지 있는 종두는 처음에는 공주의 주거공간 내부, 안방으로 침입한다. 침입자로서의 종두는 공주의 안방에서 공주를 강간하려다 실패한다. 그녀에게 여성으로서의 호감은 가지고 있었지만, 제어할 수 없었던 종두의 우발적인 행동으로 공주는 상처를 받게 된다. 하지만 공주는 종두로부터 주위사람으로 느끼지 못했던 진정한 관심과 정을 느끼게 된다. 공주의 안방은 엄연히 한 숙녀의 공간이며 은밀하여야 할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표면적인 외모나 언행에 의해서 아무런 죄책감없이 공간으로의 접근 자체부터 유린당한다. 이후 공주의 주거공간안에서 벌어지는 이웃부부의 거리낌없는 정사와 동사무소의 주거지 조사로 물건처럼 옮겨다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큰 자괴감은 공주가 종두를 다시 찾게 되는 동기로 작용하게 된다. 그전까지 종두는 자기 마음대로 화분에 숨겨진 열쇠로 문을 열고 공주의 공간을 자유롭게 침입했으나, 이후 공주는 자신이 스스로 문을 열어주는 행위를 통하여 종두가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다. 공주의 주거공간은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로 사람으로부터 침입되어지는 공간 또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가 버젓하게 침해를 받는 공간이었으나, 공주가 종두를 마음으로부터 허락하고 서로 사랑하게 되면서 공주의 주거공간은 공주가 처음으로 마음을 열게 되는 연애공간으로 변모한다. 낙후되고 열악하여 희망이라고는 찾아볼수 없을것 같던 주거공간은 남녀간의 연애로 인해 그 의미가 달라져 지극히 아름다운 공간으로 묘사된다.
주거공간 뿐만 아니라, 도시공간 전체도 연애를 하게 되는 순간부터 다시 해석된다. 종두가 나타나기 이전까지 공주가 자신의 주거 밖으로 자유의지에 의해 나갈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종두는 아파트 옥상으로 공주를 데려가게 되는데 공주는 옥상공간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이제껏 누리지 못했던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 상황이 달라짐에 따라 아파트 옥상공간 자체에 대한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 이후 둘의 데이트는 계속되지만, 1류문화로 짜여져 있는 도시공간에서 종두가 공주가 데이트할수 있는 영역은 그다지 넓지 않다. 도시사회는 그들을 받아들이기엔 아직까지는 냉정하고 가혹하다. 특별한 이유없이 둘은 1류사회인들만이 이용하는 식당공간에서 내쫓김을 당한다. 감독은 둘을 둘러싼 주변의 평범하고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공간을 나름의 해석으로 연애 공간화한다. 청계고가에서 종두가 공주를 안고 춤을 추고 공주가 지하철에서 종두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면서 커플의 로맨스가 발생되는 공간이 제한없이 자유롭게 확장된다. 더럽고 투박한 청계 고가도로와 지하철 내부공간은 충분히 아름다운 연애가 이루어질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남녀간의 연애이야기를 다루는 많은 드라마나 영화등에서도 <오아시스>만큼 지하철 내부공간 자체를 배경공간화하여 직접적으로 로맨스를 발생시킨 예는 이제껏 없었다. 또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지상낙원으로서의 '오아시스'는 바로 낙후되고 더러운 공주의 주거공간 내부에서 만들어진다. 코끼리와 동자, 그리고 무희를 동원한 환상은 이들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감독은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아예 공주의 몸 자체를 일으켜 세워서 정상인으로 행동하는 환상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관객 모두가 동의하고 진정으로 바라게 되는 이 환상적인 장면은 배우 문소리의 놀라운 연기력으로 믿을수 없을 정도로 현실감있게 보인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공주의 안방공간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다의적이고 가변적이다. 무방비상태로 유린당하는 공간에서 아름다운 연애가 발생하는 공간으로, 나중에는 연인의 사랑을 완성하는 섹스의 공간이 된다. 그러나 연인은 섹스를 완성하지 못하고 둘의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가족들에 의해 들켜버리면서 은밀하고 폐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공간은 다시한번 무참하게 유린당하는 공간이 된다. 마지막으로 공주의 안방공간 자체를 그대로 촬영한 엔딩장면은 매우 공간적이고 의도적이다. 연애라는 이벤트를 발생시킨 안방공간은 이미 공주에 의해 깨끗이 정리되어 있고 공주는 마음속의 '오아시스'인 거실공간을 청소하고 있다. 이 장면은 단지 미래에 종두와 공주가 다시 만날 것임을 시사하는 해피엔딩으로 볼 수도 있다. 종두가 비록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지만 공주의 마음속에는 사랑하는 그를 다시 만날수 있다는 희망, 이미 이전에는 몰랐던 그런 꿈을 얻게 된다. 청소되어지고 깨끗하게 정리된 공주의 안방공간은 희망을 가지고 꿈을 꾸는 공간으로 그 마지막 의미가 부여된다.
이렇게 둘은 사회가 결코 인정하지 않을 사랑에 집착하며, 사회에 적응하려 하기보다는 우선 연애감정에 충실한다. 공주가 가장 싫어하는, 창문으로 흘러들어오는 나무그림자를 없애주기 위해서 종두는 경찰서를 탈출하고 나무를 자른다. 이때 몸이 불편하고 대답할수 없었던 공주는 그 행동에 시끄러운 라디오 음악소리로 화답한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조경된 나무'와 '공공사회에서의 소음제한'이라는 공적인 요소를 제거함으로서 둘만이 통하는 사적인 연애감정만을 고스란히 끌어내고 둘의 사랑을 확립한다. 아파트 상층주거공간과 나무가 조경된 공간은 창문이라는 건축적 요소를 매개로 또한 연애공간화된다.
인생을 등급으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물질만능주의, 엘리트주의가 지배하는 1류사회의 기준에서 파생된 악습이긴 하지만, <오아시스>는 사회의 주류밖에 서있는 3류인생의 슬픈 사랑이야기에 관한 영화다. 영화는 일반 사회의 시선으로 볼때에 3류로 분류되는 이들의 1류급의 사랑에 대해서 관객을 설득시킨다. 이렇게 이 영화는 끊임없이 관객의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 노력한다. 곳곳에 나타나는 종두와 공주를 둘러싼 주위사람들-결국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일방적인 편견과 고정관념에 의한, 두 사람의 인권의 문제를 바라보는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영화 <오아시스>는 어디까지나 현 시대를 사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로서 받아들이기에 충분하다.
많이 울었다
그 환상이 현실이었으면 좋겠다
부끄럽게도 난 그처럼 그녀를 사랑하지 못할것 같다.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